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
'''World Championship England 1966'''
'''1966 FIFA World Cup England™'''

[image]
[image]
''' 대회기간 '''
1966년 7월 11일 ~ 1966년 7월 30일
''' 개최국 '''
영국(잉글랜드)
''' 마스코트 '''
월드컵 윌리(World Cup Willie)[1]
''' 주제가 '''
Where in this World are We Going
''' 공인구 '''
챌린지 포스타(Challenge 4-Star)
''' 참가팀 '''
16개팀
''' 대회 결과 '''
''' 우승 '''
잉글랜드
(1번째 우승)

''' 준우승 '''
서독

''' 3위 '''
포르투갈

''' 4위 '''
소련

''' 수상 '''
''' 골든볼 '''
바비 찰튼 (잉글랜드)
''' 골든슈 '''
에우제비우 (포르투갈)
''' 이전·이후 대회 '''
1962년
칠레

''' 1966년
잉글랜드 '''

1970년
멕시코

1. 개요
2. 지역예선
3. 경기장
4. 조 추첨
5. 본선
5.1. 조별리그
5.2. 토너먼트
6. 우승
7. 결과
8. 올스타팀
9. 오심 논란
10.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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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6년 영국 잉글랜드에서 개최된 8번째 FIFA 월드컵. 1966년 7월 11일 부터 1966년 7월 30일까지 16개 국가가 잉글랜드의 8개 경기장에서 32경기를 치렀다.
1960년 6월 이탈리아 로마 총회에서 개최지가 결정되었는데, 잉글랜드는 서독을 7표차로 제치고 월드컵 개최권을 획득했다. 초기 월드컵 때 '''정통성도 없는 것들이 깝ㄴㄴ 우리 같은 축구 종가는 그런 데 안 나감''' 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 1950년부터의 계속된 월드컵 본선의 잔혹사로 잉글랜드도 더 이상 과거의 아집에 얽매이지 않고 있었다는 반증이며, 동시에 자국에서 개최를 해서라도 자존심을 세우겠다는 뜻이었다.
이 대회에서 유명한 것은 이탈리아의 광탈과 북한의 돌풍, 포르투갈의 흑표범, 그리고 개최국에 유리한 희대의 편파판정 퍼레이드이다. 그밖에 펠레의 저주가 시작된 대회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디펜딩 챔피언 브라질이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굴욕을 겪기도 했는데, 펠레가 역사상 최악의 반칙이라는 더블 백태클을 당해 부상당한 것의 영향이 컸다. 이에 펠레는 "유럽 선수들은 풋볼이 아니라 풋복싱을 한다. 두 번 다시 월드컵에 출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리며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전세계적으로도 월드컵의 의미가 높아지면서 지역예선 참가국이 크게 늘었다. 때문에 유럽에서는 지역예선 조편성에서 최초로 4팀 1개조를 편성해야 했다.[2] 또 개최국 잉글랜드를 제외한 나머지 영국 홈네이션 3개 축구협회는 모조리 지역예선에서 조 2위로 탈락했다.

2. 지역예선


잉글랜드는 개최국 자동진출권, 브라질은 지난대회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이번대회 자동진출권을 얻었다.
  • 유럽 1조 : 불가리아, 벨기에, 이스라엘
아시아의 강호로 대접받은 이스라엘이 정치적 이유로 AFC에서 쫓겨나 본격적으로 유럽예선을 치른 첫 대회이나, 아시아와 유럽의 실력 차를 확실히 보여주었다. 아시아 최강으로 1964년 제3회 AFC 아시안컵을 우승한 이스라엘은 유럽 지역에선 1조에서 1득점 12실점 4전 전패로 탈락한다. 벨기에와 불가리아는 1승1패로 동률을 이뤄, 이탈리아에서의 중립경기에서 불가리아가 승리했다.
  • 유럽 2조 : 서독, 스웨덴, 키프로스
서독이 홈에서 스웨덴과 비겨 위태위태했지만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며 본선에 진출했다. 키프로스는 이때나 요즘이나 승점자판기.
  • 유럽 3조 : 프랑스, 노르웨이, 유고슬라비아, 룩셈부르크
전 대회 4강에 빛나는 유고슬라비아와 전전대회 4강을 거둔 프랑스의 맞대결. 룩셈부르크는 역시나 승점자판기였고, 승기를 거둔 나라는 프랑스였다. 노르웨이에 한 번 지긴 했지만 나머지 5경기를 모두 이기며 손쉽게 본선에 진출했다.
  • 유럽 4조 : 포르투갈,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터키
전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둔 체코슬로바키아의 진출이 유력해보였으나 예선 6경기 9득점 중 혼자 7골을 넣은 포르투갈의 검은 표범 에우제비우의 맹활약 속에 포르투갈이 사상 첫 본선 진출의 쾌거를 이룩했다. 혼자서 터키와의 홈경기에서 해트트릭, 원정 경기에서 결승골, 체코 원정 경기에서 결승골, 루마니아와의 홈 경기에서 결승골과 쐐기골을 다 넣었으니 체코나 루마니아 입장에선 답이 없었다. 마지막 두 경기에서 에우제비우가 침묵하고 체코와 비기고 루마니아에 패하긴 했지만 이미 본선진출이 확정된 뒤라 상관없었다.
  • 유럽 5조 : 스위스, 북아일랜드, 네덜란드, 알바니아
스위스, 북아일랜드, 네덜란드의 각축전이었는데 네덜란드가 스위스와 북아일랜드에 1번도 이기지 못하면서 스위스와 북아일랜드의 양파전으로 전개되었다. 경기가 모두 끝난 스위스가 4승1무1패, 승점자판기 알바니아와의 1경기가 남은 북아일랜드가 3승1무1패로, 당연히 스위스-북아일랜드 플레이오프를 예상했는데, 그때까지 5전 전패를 달리던 알바니아가 북아일랜드에 고춧가루를 뿌리며 무재배. 스위스가 본선행을 확정지었다.
  • 유럽 6조 : 헝가리, 동독, 오스트리아
역사적, 문화적으로 인접했던 중부유럽 더비. 셋 모두 만만찮은 전력을 지녔지만 대부분의 예측대로 헝가리가 3승1무라는 우월한 성적으로 매직 마자르는 아직 죽지 않았음을 알리며 본선에 진출했다. 동독은 하필 헝가리와 만나는 바람에 첫 월드컵 진출을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 유럽 7조 : 소련, 웨일스, 그리스, 덴마크
위대한 GK 레프 야신을 앞세운 소련에게 적수가 없었던 1강 3약 구도. 그 누구도 소련의 진출을 의심하지 않았다. 모두의 기대에 걸맞게 경기당 평균 1실점만 하며 5승1패로 본선에 진출했다. 사실 그 1패도 본선진출이 확정된 이후 전력을 다하지 않은 경기였다.
  • 유럽 8조 : 이탈리아, 스코틀랜드, 폴란드, 핀란드
2강1중1약 구도에서 1중 폴란드는 1약 핀란드에 1패를 떠안으며 광탈했다. 그리고 2강 중 스코틀랜드는 바로 그 1중 폴란드에게 홈에서 패하는 바람에 역시 탈락. 스코틀랜드와 1승1패로 동률을 이뤘지만 대신 나머지 4경기에서 3승1무를 거둔 이탈리아가 본선에 진출했다.
  • 유럽 9조 : 스페인, 아일랜드, 시리아
스페인의 우세가 점쳐지던 조. 시리아는 이때까지만 해도 유럽축구협회 소속이었는데, 아프리카 티켓 배분 문제에 대한 항의에 동조하여 기권했다. 이에 스페인-아일랜드간 홈&어웨이 경기만 치뤄졌는데 아일랜드가 의외로 선전한 덕에 1승1패 동률이 되어 프랑스 파리에서 최종전을 진행, 스페인이 진출했다.
  • 남미 1조 : 우루과이, 페루, 베네수엘라
유럽의 헝가리, 소련처럼 우루과이에 극히 유리했던 조이다. 기대에 걸맞게 우루과이는 손쉽게 4전 전승을 거두며 본선에 진출했다. 페루는 2승 2패였고, 베네수엘라는 남미예선의 승점자판기 신세.
  • 남미 2조 : 칠레, 에콰도르, 콜롬비아
전 대회 개최국에 4강 버프를 받은 칠레, 마찬가지로 전 대회 예선탈락은 했지만 레흐 야신을 상대로 4골을 퍼부었던 콜롬비아의 맞대결이 궁금했던 조였다. 하지만 콜롬비아가 1승3패로 부진한 속에, 칠레가 콜롬비아의 유일한 1승을 조공해주며 2승1무1패, 에콰도르는 콜롬비아에 2승을 거두며 역시 2승1무1패로 동률이 되어 페루에서 최종 플레이오프 끝에 칠레가 본선에 진출했다. 이때가 에콰도르가 월드컵 본선에 가장 근접했던 때로, 에콰도르는 이후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기 위해 무려 36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 남미 3조 : 아르헨티나, 파라과이, 볼리비아
남미 1조의 우루과이처럼 아르헨티나에게도 역시 적수는 없었다. 예상대로 아르헨티나가 3승1무로 본선에 진출했다.
  • 북중미 : 멕시코, 코스타리카, 자메이카
총 9개국이 참가, 1차라운드 각 조 1위 멕시코, 코스타리카, 자메이카가 결선라운드를 치뤘고 멕시코가 3승1무의 압도적 전력으로 본선에 진출했다.
  •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 : 북한,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
FIFA는 아시아&아프리카&오세아니아 3대륙을 하나로 묶어서 티켓 1장을 주고 지역예선을 치루도록 했는데 이에 반발하여 참가신청을 낸 총 15개국이 모조리 기권해 버렸다. 아프리카 국가지만 AFC&OFC와 같이 지역예선을 치루도록 배정받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아파르트헤이트로 대표되는 인종차별정책 때문에 참가권이 박탈되었다.
결국 북한, 한국, 호주간 조별리그의 승자가 아시아-아프리카 최종라운드를 생략하고 본선에 진출하게 되었는데 한국은 명목상으로 월드컵에 출전할 시 아마추어 자격을 잃을까봐 불참했다고 했지만, 당시 깡패모드였던 북한 축구국대와 괜히 붙었다가 깨질까봐 예선라운드 개최국이 일본에서 캄보디아로 변경 된 걸 핑계로 기권하고[3] KFA는 벌금 5,000달러를 FIFA에 낸다.
결국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벌어진 북한-호주간 경기에서 북한이 6:1, 3:1이라는 스코어가 보여주듯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사상 첫 본선에 진출한다.
북한은 이 월드컵에서 본선에 올라서 우승후보 이탈리아마저 격침시키는 대박을 터뜨렸고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는 3-0으로 앞서면서 절대 역전당하지 않을 거라며 방심했지만, 에우제비오 한 명에게 4골을 얻어맞은 끝에 결국 3-5로 패했고, 먼 훗날 남아공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을 다시 만났을 때에는 아예 0-7로 믹서기에 갈려버렸다.

3. 경기장


월드컵이 열린 구장이 있는 도시와 구장 이름은 다음과 같다.(가나다순) 총 7개의 도시와 8개의 구장에서 열렸다.
  • 런던 - 웸블리 스타디움 (Wembley Stadium) (98,600명)
    • 화이트시티 스타디움[4] (White City Stadium) (76,567명)
  • 리버풀 - 구디슨 파크 (Goodison Park) (50,151명)
  • 맨체스터 - 올드 트래포드 (Old Trafford) (58,000명)
  • 미들즈브러 - 에어섬 파크[5] (Ayresome Park) (40,000명)
  • 버밍엄 - 빌라 파크 (Villa Park) (52,000명)
  • 선덜랜드 - 로커 파크[6] (Roker Park) (40,310명)
  • 셰필드 - 힐스버러 스타디움 (Hillsbrough Stadium) (42,730명)

4. 조 추첨


  • 1번 포트(남미) : 브라질(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 칠레, 우루과이
  • 2번 포트(유럽) : 잉글랜드(개최국), 헝가리, 소련, 서독
  • 3번 포트(라틴 유럽) : 프랑스, 포르투갈, 스페인, 이탈리아
  • 4번 포트(나머지) : 불가리아, 북한, 멕시코, 스위스


5. 본선



5.1. 조별리그


조별 리그
1조
'''잉글랜드'''
'''우루과이'''
멕시코
프랑스
2조
'''서독'''
'''아르헨티나'''
스페인
스위스
3조
'''포르투갈'''
'''헝가리'''
브라질
불가리아
4조
'''소련'''
'''북한'''
이탈리아
칠레
1조에서는 홈팀 잉글랜드가 우루과이에게만 0:0으로 비기고 멕시코와 프랑스에 2:0 완승을 거두며 2승 1무 조 1위로 8강에 진출, 월드컵을 개최한 보람을 맛보았다. 남미의 강호 우루과이도 프랑스에 2:1로 승리하고 멕시코에 비기며 1승 2무 조 2위로 8강에 합류했다. 조 최약체였던 멕시코는 우루과이, 프랑스와 비기고 잉글랜드에 석패하며 선전했지만, 2무 1패 조 3위로 첫 2라운드 진출은 또 다시 실패했다. 프랑스는 예선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완파한 강력함은 온데간데 없었고, 약체였던 멕시코와 비겼을 뿐 잉글랜드, 우루과이에 연이어 패배하면서 1무 2패 조 최하위로 쓸쓸히 짐을 쌌다. 훗날 프랑스는 2002 월드컵, 2010 월드컵에서도 비슷하게 탈락했는데 어째 우루과이와 같은 조에 속할 때마다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조에서는 서독과 아르헨티나가 사이좋게 2승 1무를 거두었고, 골득실에서 앞선 서독이 조 1위로, 아르헨티나가 조 2위로 8강에 진출했다. 첫 경기에서 서독이 스위스를 5:0으로 관광보낸게 조 1위를 결정지은 계기였다. 마지막 서독과의 경기를 남겨두고 1승1패였던 스페인은 서독에 이기면 막판 역전 8강이 가능했고 실제로 전반 23분 선취골을 넣었으나 금방 동점골을 허용하며 가능성의 희박해지는가 싶더니 후반 39분 역전골까지 얻어맞으며 탈락했다.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 등의 레알 마드리드의 유러피언컵 5연패 주역이 은퇴한 후 호세 비야롱아가 취임하여 2년 전 유로 1964 우승을 거두었고, 앞서 몇 달 전에는 아만시오 아마로 등의 자국 선수들로 구성된 예-예 군단을 주역으로 앞세운 레알 마드리드가 빅이어를 들어올리는 등 낭보가 계속 들어온 스페인이었으나, 전 대회에 이어 이번에도 1승 2패, 조 3위를 거두며 쓸쓸히 짐을 싸야했고, 마찬가지로 스위스도 2연속 같은 기록을 세웠다. 3연패에 대회 꼴찌.... 그리고 이 대회를 끝으로 94년 미국대회에 출전하기까지 무려 28년간 월드컵 무대에서 침묵해야 했다.



3조는 이번 대회 최고의 이변이 일어난 조였다. 지난 대회 부상으로 1경기 출장에 그쳤지만 여전히 골 넣는 기계였고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였던 펠레, 그리고 펠레를 뒷받침하는 가린샤가 버티는 브라질은 월드컵 3연패를 목표로 왔고, 첫 경기 불가리아전에서 펠레의 골로 2:0 승리를 거두었으나 불가리아 수비수들의 거친 수비로 펠레가 부상을 입어 다음 경기에 결장했다. 결국 그게 원인이 되어 2차전 헝가리전에서 충격적인 1:3 패배를 당한 브라질은 부상에서 회복되지 않은 펠레까지 출전시키며 포르투갈을 상대했으나 펠레는 부상에서 회복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포르투갈 수비수의 태클로 다시 부상을 입어 활약하지 못했고, 오히려 포르투갈의 에우제비오가 날아다니며 두 골을 기록, 브라질은 1:3으로 패하며 디펜딩 챔피언 1라운드 탈락의 굴욕을 맛보았다. 결국 3조에서는 3승의 포르투갈(조 1위), 2승 1패의 헝가리(조 2위)가 8강에 진출했다. 특히 포르투갈의 경우 월드컵 첫 진출에 3전전승 8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아무리 에우제비오라는 전설의 선수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고, 역시나 8강에서 이변의 팀이었던 북한을 누르고 4강에 오르는 기적을 발휘한다. 다만 이 때를 반짝으로 다음 대회 지역예선에서는 최하위로 광탈했고, 이후 1989/1991 세계청소년대회 2연패와 유로2000 4강에 진출하기 전까지 포르투갈은 심각한 침체기를 겪는다.
4조에선 대회 강력한 우승후보 중 하나로 손꼽히던 소련이 3전 전승으로 손쉽게 8강에 진출했다. 전설의 골키퍼로 불리는 레프 야신은 월드컵 본선에서 지난 대회의 굴욕을 씻으려는 듯 놀라운 선방을 연달아 보여주며 '''3경기 1실점'''을 기록, 상대팀 공격수들을 좌절시켰다. 한편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은 2차전 칠레 축구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전반 패널티 실점으로 패색이 짙다가 박승진이 후반 43분 극적인 동점골을 넣으며 죽다 살아났고, 칠레는 승점자판기로 생각한 북한에 비기면서 8강행에 먹구름이 끼었다. 그리고 3차전 이탈리아전,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은 전반 34분, 주장 지아코모 불가렐리박승진에게 태클을 걸다 도리어 태클을 건 자신이 부상을 당하며 퇴장해 10명으로 플레이를 하게 되는 악조건에 놓였다. 이 대회까지 선수 교체 제도가 없어서 출장한 선수는 무조건 90분 풀타임을 다 뛰어야 했고 부상을 당해서 경기를 뛸 수 없는 상태가 되면 그 선수가 빠진 상태로 계속 치러야 했기 때문. 결국, 전반 42분에 박두익에게 결승골을 얻어맞고 0 : 1로 패배하며 1승 2패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는 훗날 FIFA 랭킹 57위이던 대한민국카잔에서 직전 월드컵 디펜딩 챔피언이자 FIFA 랭킹 1위이던 독일2:0으로 꺾어넘긴 사건과 상당히 유사하다. 당시 이탈리아 선수단은 라커룸에서 대성통곡을 했고, 이 패배로 인한 조별리그 탈락 때문에 분노한 자국 팬들의 보복이 두려워 일부러 늦은 새벽시간을 이용해, 공항까지 바꿔가며 귀국했으나, '''그 때까지 잠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던 성난 축구팬들에게 썩은 토마토 및 날계란 세례를 맞는 굴욕을 맛봐야 했다.''' 또, 당시 이탈리아 대표팀 감독이었던 에드몬도 파브리는 즉각 경질은 물론 1년간 근신 처분까지 받는 굴욕도 당했다. 지금도 이탈리아 노인들이 박두익의 석자를 기억한다는 걸 볼 때 이탈리아 노인들은 이 굴욕을 단단히 기억하고 있는 모양.
북한-이탈리아전 다음날 열린 소련과 칠레의 마지막 경기에서 칠레도 이기기만 하면 북한과 GAv를 비교해볼 여지가 있었으나 소련의 벽은 높아 결국 패배. 4조에서는 소련과 북한이 8강에 진출했는데 특히 북한의 8강은 단순히 아시아 최초의 2라운드 진출이 아닌, 유럽/남미가 독식하던 본선 2라운드에 최초로 비유럽/미주팀이 올라가는 사건이었다.[7][8]

5.2. 토너먼트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8강 이후 참조.
경기
대진표
경기
대진표
경기
대진표
A
8강 1경기
'''잉글랜드''' 1:0 아르헨티나
E
4강 1경기
'''잉글랜드''' 2:1 포르투갈
G
결승
'''잉글랜드''' 4:2 서독
B
8강 2경기
'''포르투갈''' 5:3 북한
-
C
8강 3경기
'''서독''' 4:0 우루과이
F
4강 2경기
'''서독''' 2:1 소련
D
8강 4경기
'''소련''' 2:1 헝가리
H
3/4위전
'''포르투갈''' 2:1 소련

6. 우승


[image]
-우승과 함께 쥘 리메 컵을 들어올린 바비 무어.
'''1966 FIFA 월드컵 우승'''
[image]
''''''잉글랜드''''''
첫 번째 우승


7. 결과


순위
국가
경기





득실
승점
비고
1
잉글랜드
6
5
1
0
11
3
+8
'''11'''
'''우승'''
2
서독
6
4
1
1
15
6
+9
'''9'''
준우승
3
포르투갈
6
5
0
1
17
8
+9
'''10'''
3위
4
소련
6
4
0
2
10
6
+4
'''8'''
4위
5
아르헨티나
4
2
1
1
4
2
+2
'''5'''
8강
6
헝가리
4
2
0
2
8
7
+1
'''5'''
8강
7
우루과이
4
1
2
1
2
5
-3
'''5'''
8강
8
북한
4
1
1
2
5
9
-4
'''3'''
8강
9
이탈리아
3
1
0
2
2
2
0
'''2'''
1라운드
10
스페인
3
1
0
2
4
5
-1
'''2'''
1라운드
11
브라질
3
1
0
2
4
6
-2
'''2'''
1라운드
12
멕시코
3
0
2
1
1
3
-2
'''1'''
1라운드
13
칠레
3
0
1
2
2
5
-3
'''1'''
1라운드
13
프랑스
3
0
1
2
2
5
-3
'''1'''
1라운드
15
불가리아
3
0
0
3
1
8
-7
'''0'''
1라운드
16
스위스
3
0
0
3
1
9
-8
'''0'''
1라운드

8. 올스타팀


'''1966 FIFA 월드컵 베스트 XI'''
FW
플로리안 알베르트 (헝가리)

FW
우베 젤러 (서독)

FW
에우제비우 (포르투갈)
MF
프란츠 베켄바우어 (서독)

MF
마리우 콜루나 (포르투갈)

MF
바비 찰튼 (잉글랜드)
DF
조지 코헨 (잉글랜드)

DF
바비 무어 (잉글랜드)

DF
비센테 (포르투갈)

DF
실비오 마르솔리니 (아르헨티나)
GK
고든 뱅크스 (잉글랜드)

9. 오심 논란


잉글랜드가 처음부터 편파판정으로 올라간 것 아니냐고 오해할 수 있는데, 조별리그는 압도적인 실력으로 순조롭게 통과했다. 조별리그에서는 오히려 우루과이나 프랑스, 멕시코 선수들이 고의적으로 강팀 잉글랜드를 어떻게든 막아 보겠다고 에이스들을 향한 파울을 일삼았다. 대표적인 피해자가 지미 그리브스와 앨런 볼. 특히 지미 그리브스의 경우에는 조별리그 3경기 내내 심한 견제를 받은 것이 부상에 악영향을 미쳐 그대로 대회를 마감했고, 토너먼트부터는 제프 허스트가 빈자리를 채우게 된다. 여튼 이런 심한 플레이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를 상대한 팀들의 선수 중에는 주심의 제제를 받은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전에서는 바비 찰튼의 정당한 골이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아 취소되기도 했다. 즉, 잉글랜드가 조별리그를 1위로 통과하는 과정에서는 편파판정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잉글랜드가 불이익을 봤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3조 브라질 탈락의 경우 잉글랜드 월드컵 조직위원회에서 주심을 유럽인들로만 구성하여 고의적으로 브라질을 떨어뜨리기 위해 편파판정을 했다는 소문이 있다. 이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경기들을 맡았던 주심들을 살펴보면 불가리아전은 쿠르트 첸셔(Kurt Tschenscher:서독), 헝가리전은 켄 다그날(Ken Dagnall:잉글랜드), 포르투갈전은 조지 맥케이브(George McCabe:잉글랜드)로 잉글랜드인 2명, 서독인 1명으로 분명 유럽 심판들을 많이 기용했다. 그러나 편파판정을 했다는 추측만 있을 뿐 근거가 없으므로 루머에 불과하다. 주심이 편파판정을 일삼았다고 하는 이야기는 당시 축구판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거나 당시 브라질 국가대표팀의 풀경기 영상을 보지 않고 하는 이야기이다. 브라질은 파울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헝가리나 포르투갈을 상대로 좋은 경기를 보여주지 못했으며, 자신들도 비슷한 강도의 파울들과 비매너 행동을 저질렀다. 특히 포르투갈전에서 먼저 거칠게 플레이한 쪽은 포르투갈이 맞으나, 먼저 감정적으로 시비를 건 쪽은 엄연히 브라질이었다. 또 당시에는 카드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고, 태클로 인한 파울에 의한 퇴장보다는 정도가 지나친 말싸움 혹은 주먹질 등의 폭력에 의한 퇴장이 많았다. 파울 좀 심하게 했다고 퇴장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일례로 펠레를 부상 입힌 주앙 모라이스의 더블 백태클은 현대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명백한 퇴장감이지만, 당시에는 그런 파울조차도 선수에게 구두주의를 주는 수준에서 그치는 경우가 절대다수였다.
진정으로 논란이 되는 것은 8강전이다.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8강전 전반 35분 즈음에 주심이 안토니오 라틴의 깊은 태클에 파울을 선언했고, 안토니오 라틴과 주변에 있던 아르헨티나 선수들이 이에 대해 거칠게 항의하자 주심은 자신에게 욕을 한 것으로 오인하여 퇴장시켜 버렸다. 라틴은 당연히 제대로 화가 났고 경기장을 빠져나가지 않은 채 항의를 계속했다. 이 사태로 인해 경기는 7분 가까이 지연되었고 주최 측은 라틴을 설득하느라 통역사까지 불러와야 했다. 라틴은 씁쓸하게 경기장을 빠져나갔고,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이자 팀 주장인 라틴을 잃은 아르헨티나는 완벽한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이후에는 조별리그에서 그랬듯 바비 찰튼과 바비 무어가 경기를 완벽하게 지배하며 잉글랜드가 승리를 거둔다. 루돌프 크라이틀라인은 안토니오 라틴의 퇴장 사유를 '폭력적인 언행'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루돌프 크라이틀라인은 서독 사람이었고, 잉글랜드 선수와 아르헨티나 선수들 모두 크라이틀라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크라이틀라인 역시 영어와 스페인어를 대부분 알아듣지 못했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잉글랜드의 잭 찰튼과 바비 찰튼에게도 구두주의를 주었다는데, 잭 찰튼은 그 사실을 다음 날 경기 리포트를 보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즉, 루돌프 크라이틀라인 주심은 양 팀 선수들 모두와 말이 안 통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근거를 들어 퇴장을 선언했으니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경기는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주심과 선수 간에 확실한 경고 표시 수단이 없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래서 1970년 월드컵부터는 확실한 경고 표시를 주된 목적으로 하여 옐로/레드 카드 제도가 도입되기에 이른다. 즉, 옐로/레드카드의 도입은 말이 통하지 않는 선수와 주심 간에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며, 선수 보호는 딸려 온 개념에 불과했다. 참고로 이 옐로/레드카드 제도는 켄 애스턴이라는 잉글랜드인 심판의 아이디어이다.
4강 포르투갈전에서는 편파판정 논란이 전혀 없었고, 결승전은 양 팀 모두 판정에 울고 웃었는데, 먼저 서독의 동점골 상황에서 슈넬링어의 팔에 공이 맞는 상황이 발생했다. 무어와 뱅크스가 항의했으나 소용없었다. 연장전에서는 연장전 제프 허스트가 슈팅한 공이 크로스바를 맞고 골 라인 위에 불분명하게 떨어진 뒤 다시 튕겨 나왔는데, 이것이 골로 선언되며 우승을 차지했다. 2010년 월드컵때는 독일과 16강에서 다시 맞붙었는데 이 상황이 오히려 역전되어 프랭크 램파드가 정당하게 넣은 골이 노골로 판정되었다. 독일의 입장에서는 그때의 한을 확실하게 풀어버린 셈.
잉글랜드의 홈 어드밴티지를 비판할 때 '웸블리 6연전'등을 근거로 비판하는 것은 옳은 비판이지만, '편파판정'은 루머에 불과하다.

10. 이야깃거리


  • 잉글랜드는 홈 어드밴티지를 극대화하기 위해 예선 전 경기는 물론 자국이 치른 8강, 4강, 결승전을 모두 같은 경기장(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치렀다. 웸블리 스타디움은 잉글랜드 월드컵 당시 경기장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수용인원도 10만 명에 달하는 구장이었다.
  • 2018년 대회까지 마친 현재도 빨간 유니폼을 입은 팀이 우승을 거둔 유일한 대회이다. 이후 빨간색을 팀컬러로 쓰는 스페인이 우승했으나, 당시 스페인이 입었던 유니폼은 남색 세컨드 유니폼이다. [9]
  • 펠레는 잉글랜드에 입국하면서 "우리는 우승을 하기 위해 왔으며, 줄 리메는 브라질의 영광을 지켜줄 것이다"라 하였으나 현실은 1라운드 광탈. 물론 상대팀의 거친 수비로 인한 펠레의 부상이 있긴 했지만…. 사람들은 이를 펠레의 저주의 시초라고 한다. 참고로 이 시기가 바로 다름아닌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였으며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으로부터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에 이르기까지 12년동안 브라질이 우승은 커녕 1라운드조차도 통과못한 월드컵은 이 대회가 유일했다.
  • 북한이 무서워서 지역예선에서 기권한 한국은 타도 북한을 외치며 중앙정보부가 직접 양지라는 축구팀을 창단하여 관리, 운영하였으나 북한과는 한 번도 경기를 치루지 못하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이 실각하면서 해체되었다.
  • 비유럽/미주팀 최초로 본선 2라운드 진출의 쾌거를 올린 북한도 이후 내부사정[10]으로 축구 국가대표팀을 후원한 당 간부가 숙청되는 것을 계기로 수십년동안 해외무대에서 모습을 감추었고, 이 기간동안 북한 축구는 세계축구와의 격차가 크게 벌어져 버렸다.
  • 북한은 체격조건이 월등한 유럽팀들을 상대하기 위해 사다리 전법을 고안했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흔히 아래 사진이 '사다리 전법'을 이용한 헤딩 사진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 사다리 전법은 일반적인 공격, 미드필더, 수비진 삼선을 기준으로 4-4-2 같은 포메이션이 아니라, 선을 단 두개만 둔 5-5 혹은 4-6 같은 극단적인 포메이션 전술을 뜻하는 것이다. 아래 사진은 운 좋게도 동료 선수들을 이용하여 시간차 점프하는 것처럼 사진이 찍혔을 뿐, 이것이 사다리 전법은 아니다.
  • 잉글랜드는 이 대회 이후 우승은 커녕 결승전에 가지도 못했다. 24년 뒤인 1990년 월드컵과 그로부터 28년 뒤인 2018년 월드컵에 4강에 진출하였는데 최종 결과는 모두 4위다.
  • 영국은 한국전쟁때 UN군의 일원이었기에 북한은 당연히 영국의 적성국가였다. 소련, 헝가리 등 다른 공산권 국가야 공식적으로는 일반 수교국에 불과했으니 이들이 참여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였던 것. 더군다나 남북한의 정통성 문제 때문에 영국은 아예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고 있지도 않았다. 때문에 영국은 한국 정부에 미리 비정치적 국제 스포츠 행사에 북한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며, 절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사전 양해를 구했다. 한국 정부는 '북괴' 축구 입국 허용에 유감의 뜻을 표했다. # 다만 본선진출 16개국의 국기로 만들기로 한 기념우표는 북한 국기 문제로 다른 도안으로 바꿨다. 사실 대회의 특성상 영국 자국 국기도 없긴 했지만[11]. 북한 국가가 연주되는 꼴을 막기 위해서인지 개막전과 결승전을 제외한 경기에서 국가 연주를 하지 않았다.
  • 훌리건의 선배격에 해당하는 영국 관중들이었지만 당시에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선보이며 잉글랜드가 출전하지 않는 경기도 대부분 매진을 기록시키며 열렬한 성원을 보냈다. 특히 북한의 플레이에 열광한 영국팬들이 많았는데, 영국 국가 차원에서는 북한의 출전이 껄끄러웠겠지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유럽, 미주를 제외한 유일한 국가인 북한이 대회 내내 좋은 경기를 선보인데다가 콧대 높은 이탈리아마저 꺾자 많은 팬들이 북한 경기를 보기 위해 몰려 들었고, 지금도 영국에서는 당시 북한팀에 대한 향수를 가진 팬들(지금은 70~80대가 되어버린)이 많이 있다. 이런 배경에서 후술하는 천리마축구단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제작될 수 있었다.
  • 대회 기간 중 런던 국회의사당에 전시중이던 줄리메 컵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국제적 망신을 당한 영국 경찰은 즉시 이잡듯이 줄리메 컵 수색에 나섰는데, 엉뚱하게도 '피클스'라는 이름의 개가 줄리메 컵을 들고 왔다. 이 개는 주인이 훔쳐 집 뒷마당에 묻어놓은 줄리메 컵을 도로 파서 들고 다니다가 발견된 것.
  • 본래 참가국 국기로 도안하기로 한 기념우표가 북한 문제로 축구경기 장면 도안으로 바뀌었는데 발매 이후 살펴보니, 모두 다 반칙 장면들로 판명이 나 영국은 또 망신을 당해야 했다.
  • 펠레, 에우제비우 등 세계 최고의 스타들이 나온 대회였으나 이들에 대한 거친 수비와 파올, 그리고 이에 대한 불복 등 많은 문제가 지적되었다. 결국 다음 대회에서부터 카드 개념이 생겨나기에 이른다.
  • 북한 대표팀 선수들이 귀국한 이후, 선수들과 코치진들이 정치범 수용소에 끌려갔다는 카더라가 많이 나돌고 있다. 대표적 인물로 요덕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고 알려진 박승진이 있다. 그 이유도 선수 중 일부가 영국의 사창가에 다녀 온게 발각당해서 그렇다느니, 혹은 북한의 정치적 숙청에 선수진들이 휘말렸다느니 등 여러가지이다. 그러나 영국 감독 대니얼 고든이 제작한 북한의 8강 진출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천리마축구단'에서 생존해 있는 선수들을 감독이 만날 수 있었고, 이 중 일부는 북한의 고위층 인사로도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처음부터 사실이 아니거나 혹은 선수진 중 일부 사람들이 다른 이유[12]로 고난을 겪은 것이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1]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초의 마스코트[2] 기존 유럽예선에도 4팀 1개조가 없던 것은 아니나, 그 유이한 경우는 모두 1950, 54년 대회의 영국 홈네이션만 따로 모아둔 조다.[3] 당시에는 국민들의 반공정서가 극에 달하던 시기였고 박정희가 대통령인 시절이라 남한이 북한에게 지는 일은 체제 경쟁에서 밀린다는 의미였기에 져서 돌아왔으면 무슨 일을 당했을지 알수가 없다.[4] 1908년에 개장하여 1985년에 철거된 1908 런던 올림픽의 주경기장이였다. 현재는 BBC 화이트시티가 이 자리에 들어서 있다.[5] 1903년에 개장하여 1995년까지 미들즈브러 FC가 사용하고 1997년에 철거된 옛 축구장.[6] 1898년에 개장하여 1997년까지 선덜랜드 AFC가 사용하고 1998년에 철거된 옛 축구장[7] 비유럽/남미팀 중 가장 꾸준히 월드컵을 밟은 멕시코도 이때까지 본선 2라운드는 꿈도 못꾸고 있었다. 초대 대회에서 미국이 4강에 진출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선수가 스코틀랜드 프로리그에서 뛰어서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 팀이라는 비아냥을 받았었다. 사실상 비유럽/비남미 팀에서는 38년 쿠바 이후 두번째라 봐도 무방하다.[8] 대한민국은 5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해외 월드컵에서 8강 이상 올라가본 적이 단 한번도 없기에 이념을 떠나서 북한의 8강 진출은 굉장히 의미있는 기록이기도 하다.[9] 당시 독일은 어웨이 유니폼을 입고 뛰었는데, 검은 바탕에 가로로 붉은 줄무늬가 들어가있는 유니폼이었다. 이 유니폼은 브라질의 인기 구단 CR 플라멩구의 유니폼에서 영감을 받았다.[10] 대회가 끝난 후, 북한 대표팀 주전수비수가 지주의 아들임이 들통나 숙청당했다. 사창가 간게 들통나 아오지로 갔다는 루머는 구라지만, 실제 이런 문제로 아오지행을 당한 선수는 있었던 것.[11] 이 대회에서 잉글랜드 팀이 국기로 잉글랜드 기를 썼는지, 유니언 잭을 썼는지는 당시의 사진 자료들을 찾아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각종 기념품에 나온 참가국 국기에 영국 국기를 사용한 사례는 적지 않게 나왔고, 대회 포스터도 잉글랜드가 아닌 영국 기를 기본으로 디자인하여 만든 것이어서 영국 국기를 사용하였을 개연성도 있었지만 실제 대회 개회식의 입장식(실제 참가 선수는 아니고 영국 청소년들이 참가국의 유니폼을 입은 가상 행진)에서 잉글랜드 기를 사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9분 50초 [12] 주전수비수 신영규가 지주의 아들로 발각나서 갑산파 숙청 당시에 싸잡혀 숙청 당한 후, 지방에서 도자기 공장 노동자로 고생했다.